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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 2012.02.10 / 광주매일 / “강진청자는 내 인생 최고의 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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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7-03-24 10:34 조회33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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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 사람들] “강진청자는 내 인생 최고의 애인”
전라도 전라도 사람들 / <5>김경진 강진청자협동조합 이사장

1987년 강진군 대구면 사당리에 첫 민간요업체 열어
25년만에 30곳으로 증가 국비지원 향토산단 탈바꿈
생활도자기 양산…청자 대중화·생활화·산업화 최선

 입력날짜 : 2012. 02.10. 00:00

한 평생 흙과 같이하며 30여년 째 도공의 삶을 걷고 있는 김경진 강진청자협동조합 이사장은 강진군 대구면 사당리 청자도요지에서 ‘탐진청자’를 운영하며 강진 고려청자의 명맥을 잇고 있다. /사진=김기식 기자 pj21@kjdaily.com

<題字-담헌 전명옥>
1987년 7월7일. 당시 촉망받던 25살의 청년 도공은 강진군 대구면 사당리에 자그마한 민간요 업체를 차렸다. 허허벌판 논 뿐 이던 그곳엔 강진청자박물관만이 덩그러니 있었다. “고려청자의 명맥을 이어 생활 속에서 손쉽게 쓸 수 있는 생활도자기로 만들어 보자.” 그렇게 이곳의 변신은 시작됐다. 청년 도공의 실력과 가게 입소문을 듣고 외지에서 도공들이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1개 뿐 이던 민간요 업체는 10년 뒤, 17곳으로 늘었다. 그리고 또 10년의 세월이 흐른 뒤, 30개 업체로 늘어난 이곳은 국비지원까지 받는 향토산업단지가 됐다.
강진군 대구면 사당리 고려청자 도요지(陶窯址·도기를 굽던 가마의 터). 이곳에서 30명의 도공들은 자기 빛깔을 내면서 ‘강진청자’의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청자재현에 30여년을 바쳐온 김경진(51) 강진청자협동조합 이사장이 있다.
강진청자도요지를 찾아가는 길은 감탄을 자아낸다. 시원스레 뻗은 해안도로를 10㎞정도 따라 가다보면 탁 트인 강진만이 눈에 들어온다. 그 속엔 앙증맞은 작은 섬들이 둥둥 떠 있다.

강진이 청자의 산실이 된 것도 이와 깊은 연관이 있더랬다. 도자기를 굽는데 필요한 고령토와 땔감, 잘 발달한 수로 등의 여건이 딱 맞아 떨어지는 까닭이다.

실제 강진에는 전국 400여개의 옛 가마터 중 188개가 밀집돼 있다. 강진 청자도요지 입구에는 도자기를 굽던 옛 가마터가 그대로 남아 있다. 흙으로 외관을 토속적으로 꾸민 민간요 업체들의 모습도 이채롭다.

이곳에서 김 이사장은 25년째 도자기업체 ‘탐진청자’를 운영하고 있다. 강진청자도요지 민간도자기업계의 산증인인 셈이다.

“처음에 왔을 땐 온통 논 뿐 이었어요. 이 청자의 흙은 어디에서 나왔는지, 손금 보는 것처럼 강진 곳곳을 돌아다니며 찾아다녔죠. 새로운 것을 만들어 보고 색다른 형태의 도자기를 만들어 직접 팔러 다녔습니다.”

김 이사장의 고향은 뿌리깊은 강진이다. 어릴 적 밀가루처럼 부드러운 흙을 반죽해 물레에 돌리는 모습이 그저 신기해 시작한 것이 ‘청자쟁이’가 됐다.

서로의 특징을 이해하고 교류함으로써 ‘소통’을 실천하고 있는 강진 청자도요지의 도공들이 자신들이 만든 청자를 들어보이며 밝게 웃고 있다. /사진=김기식 기자 pj21@kjdaily.com

군대를 다녀온 뒤 본격적으로 청자를 빚었다. 허나 맨땅에 헤딩이었다. 어깨너머로 배워 품팔이 하는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그는 경기도 이천·여주·광주 등 도자기를 배울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 찾아가 배웠다. 1987년 강진 향토 작가 초대전을 시작으로 각종 대회 입상과 전시회에 출품을 하며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강진청자도요지에 탐진청자를 열면서 사업전선에 뛰어들었다. 김 이사장의 인생에서 빠질 수 없는 스승은 바로 고려청자 재현을 위해 평생을 바친 전통 도예가 고현(古現) 조기정 선생이다.

“조기정 선생님은 일본과 국내의 도요지를 누비며 평생을 고려청자 재현과 강진청자사업소 재건을 위해 노력해 오셨어요. 그분의 이수자가 됐고 청자의 맥을 이어왔습니다. 선생님이 계셨기에 지금의 저도 있는 거죠.”

그는 더 많은 사람들이 고려청자에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강진청자를 공부하고 탐진요를 통해 작품 활동을 해오고 있다. 특히 전통적인 것을 받아들이면서 현 시대에 맞는 감성을 담은 고려청자 연구를 끊임없이 해오고 있다.

“청자는 귀하다. 비싸다며 못 접했는데 청자를 생활도자기로 만들었어요. 고려시대 청자는 역사이지만 지금은 21세기입니다. 신세대에게 맞는 도자기를 만들고 청자도 실용가치가 있는 곳에 접목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색다른 작품을 만들고 또 이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작품을 팔면서 그렇게 성장했죠.”

그의 열정에 해가 갈수록 청자도요지를 찾는 사람이 늘었다. 외지에서도 입소문을 듣고 청자도요지에 대한 문의를 해왔다.

이렇게 25년이 지난 지금 청자도요지에는 30곳의 민간요업체가 들어서 있다. 그리고 이들은 10년 전부터 ‘강진 청자협동조합’이라는 이름으로 끈끈하게 묶여 있다.

청자 역사와 전통을 잇는 재현작업은 관요(官窯)인 청자박물관이 주로 맡는다면 강진 청자협동조합은 청자의 대중화와 생활화, 산업화에 집중하고 있다. 특히 강진 청자를 중심으로 한 ‘웰빙 도자산업’이 2009년 농림부의 향토 산업으로 지정되면서 청자협동조합도 더욱 힘을 받게 됐다. 향토산업을 통해 이곳 민간요 업체들에게 홍보비, 포장재, 전시회비, 디자인 개발비 등이 지원되고 있다.

특히 청자산업화를 위해 청자식기도 강진 식당 곳곳에 보급됐다. “강진 사람들은 청자에 담긴 거 아니믄 안 먹은 당께.”그렇게 강진은 이런 우스갯소리가 우습게 들리지 않은 곳이 됐다.

이곳 청자도요지의 도공들은 저마다 ‘소통’을 실천하고 있다. 혼자 할 수 있는 것은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들은 서로의 특징을 서로 이해하고 교류하면서 더불어 상생하고 있다.

“흙을 많이 쓰면 거짓이 없어요. 도자기는 정성을 들인 만큼 나옵니다. 억지로 하려하면 나올 수 없어요. 욕심 부리면 다 깨지기 마련이에요. 스스로 정성을 들여 작품을 만들었다면 그 정성을 평가하고 생명력을 불어넣을 수 있어야 합니다.”

김 이사장의 목표는 청자를 좀 더 발전시켜 저변층 도공들이 끊임없이 나오도록 하는 것이다. 서양화를 전공한 그의 아내도 일찍이 고려청자에 깊은 관심을 갖고 함께 사업을 꾸려가고 있다. “첫째 딸은 대학에서 동양화를 전공하고 둘째는 조각을 공부하고 막내아들은 도예과에 다니고 있어요. 가족모두 저와 함께 청자에 대한 관심이 많죠. 아버지로서 가장으로서 뿌듯합니다.”

멜라닌, 플라스틱 그릇 등이 쏟아지는 현대 속에서 김 이사장이 청자에 한평생을 바치고 있는 이유는 단순히 오래된 문화를 보존하고 지키기 위해서만이 아니다. 오랜 역사가 우리에게 선물한 ‘전통’이라는 귀한 가치를 먼 미래의 후손들도 보고 만지고 느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그래서 그는 지금 이 순간에도 새로운 ‘청자’를 만들기 위한 도전을 멈추지 않는다.

참, 그의 피부가 까무잡잡한 것이 불을 가까이 하는 직업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6개월전 신장이식수술을 했다. 스트레스 때문에 지병이 돼서 신장투석을 7년 동안이나 해왔단다. 그리고 7개월 전 지인으로부터 신장을 기증 받아 현재는 건강 회복중이다. 그는 “죽을 몸이었는데 행운이죠”라며 웃는다.

젊은 시절 열정을 오로지 흙과 같이 하며 외롭고 힘든 도공의 길을 걸어온 김 이사장은 “청자는 인생의 제일 즐거운 작품이자 애인이다. 수천 년이 지나도 변함이 없는 청자처럼 꿋꿋하게 도공의 길을 가겠다”며 청자처럼 맑고 은은한 웃음을 지었다.

/글=오경은 기자 white@kjdaily.com
/사진=김기식 기자 pj21@kj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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