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오빠 언니! 그동안 몸 건강하십니까? 그리움으로 날이 가고, 해가 흘러 그 세월 어느덧 7년 세월 다갔습니다. 한 핏줄을 타고 이 세상에 태어나 우리 6남매는 오늘에 이르러 땅속 저 세상으로 절반가고, 남아있던 이 막내마저 그처럼 사랑하던 오빠와 언니의 곁을 떠나 햇빛에 아침이슬 사라지듯 소리 없이 없어졌으니 그 동안 오빠 언니가 흘리신 눈물 얼마나 많으셨을까?
타는 가슴속에 눈물마저 말라 버렸을 오빠 언니를 생각하면 만날 수 없는 이곳에 와 있는 동생의 눈시울과 볼도 마를 날이 없답니다. 그동안 살아 계신다는 소식은 어렴풋이 듣긴 했지만 어떻게 살고 계시는지? 70고령을 다한 우리 언니, 고사리처럼 등, 허리 다 구불고 한 평생고생으로 얼룩진 우리언니의 인생 너무도 기막히고 불쌍합니다.
그리운 우리오빠 언니! 남은여생 과연 얼마나 되실까? 형제간의 정으로도, 부모자식간의 정으로도 절대적인 생활문제를 도와드릴 길 없는 세상에서 긴 세월 오히려 부담으로 느껴지시리라 봅니다.
이 동생은 참다못해 그 세월 등지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말 한마디 못하고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 고향과 정든 집을 뒤에 두고 이국땅을 밟았고, 지금에야 찾은 내조국 대한민국의 품에 안기게 되었습니다.
제가 떠날 때 간다는 말 한마디 못하고 온 것이 너무도 마음 아프고 죄송합니다. 하지만 내가 선택한 이 길이 얼마나 잘 된 일인지 소리쳐 호소하고 싶고 알리고 싶지만 그 곳은 너무도 멀리 있어요. 오늘 이렇게 마음 놓고 펜을 들어 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속에 엉켰던 응어리들을 조금이나마 풀어내는 것 같은 기분이랍니다. 비록 두 손을 맞잡고 이야기를 나누지는 못하지만 이 작은 종이위에 그간의 맺힌 멍우리를 담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오빠 언니! 세상에 지옥과 천국이 따로 있다면 이 동생이 살고 있는 이 땅, 대한민국이 바로 천국입니다. 조금은 서운하시겠지만 이 동생이 50평생 넘게 살아온 그 북녘 땅은 그야말로 암흑의 땅이랍니다. 지금 천국에 와 있습니다. 한 어머니의 뱃속에서 태어났어도 서로의 삶은 이렇게 판이한 현실로 나뉘어진 우리형제의 슬픔 이것은 분단된 우리민족의 슬픔으로 역사를 기록 될 것입니다.
우리가족은 대한민국에 도착한 날부터 정부의 지원으로 집과 정착금도 받았고, 취미와 적성에 따라 대학과 직장에도 갈수 있고 가족들이 하고 싶은 모든 것을 다 누리고 살고 있답니다. 큰애는 대한민국의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는 연예인이 되였고 둘째도 결혼을 해 아들딸 낳고 잘 살고 있답니다.
공부 잘 하면 가고 싶은 대학에도 갈수 있고, 능력을 발휘해 일하면 돈도 벌수 있고 돈만 있으면 이 세상 어느 나라든 마음대로 가볼 수 있는 자유를 가지고 산답니다. 다른 사람보다 많은 돈을 벌어도 잘 살아도 이상한 눈초리로 보는 사람도 없고 장사를 해도 누구하나 단속하는 사람도 없는 그야말로 조롱 속에서 풀려나와 저 넓은 하늘을 마음껏 훨훨 날아가는 새처럼 평화로운 모습이지요.
누구나 다 자기 자동차를 가지고 우리나라 구석구석 그 어디든 다 가 보아도 단속도 증명서 검열도 없답니다. 고위 간부가 아니래도 다 비행기도 탈수 있고 다른 나라에도 아무 때든 가볼 수 있는 자유가 있는 세상이랍니다. 이 세상 끝까지 다 갈수 있지만 오직 내가 나서 자란 고향, 혈육들이 남아있는 북녘 땅만 못가니 이 울분을 무엇으로 씻어야 한단 말입니까?
하늘아래 먹을 것도 입을 것도, 물도 전기도 모든 것이 다 없는 암흑의 세상에서 내 혈육들이 살고 있다는 것이 너무나 안타깝고 마음이 아픕니다.
사랑하는 오빠 언니! 이제 남은여생 얼마 남지 않은 여생이지만 이 막내 동생과 가족이나마 형제들을 대신해 좋은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만이라도 기쁘게 생각해 주세요. 언젠가는 꼭 만나고 도와 드릴 수 있는 기회가 있을 거예요. 그때가 멀지 않고 가까이에 있다고 생각해 주세요. 남북관계도 점점 좋아지고 지금 북한 동포들은 평화를 지향하는 세계 진보적 인민들의 관심 속에 있습니다.
그 땅에서 살아온 우리들의 생각에서는 계란으로 바위를 쳐서 부스러뜨리려는 모습으로 밖에 안 보인다고 역설하지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오빠, 언니 우리 네 살 된 손주 호현이도 엄마 고향 이야기를 제일 좋아하고 자기도 빨리 커서 아빠 엄마의 손목잡고 엄마 고향에 찾아간대요. 잠을 자도 늘 할머니 곁에서 ‘할머니, 엄마고향 옛말 또 해 주세요’ 하고는 이 할머니의 손을 꼭 잡고 어느새 쌔근쌔근 잠든답니다.
어느새 이 막내가 60이란 늙은이가 다 됐지만 아직도 어릴 때 학교에 다닐 때마다 머리도 빗겨주고 언 손을 입김으로 호호 불어주던 언니 오빠의 그때 그 심정이랍니다. 그때는 오직 형제들의 사랑만 받고 살아왔던 내가 지금은 한 나이라도 젊은 이 동생의 손으로 오빠 언니의 손을 잡아드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습니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밤에 자다가도 다녀오는데 그보다 더 가까운 거리를 못가고 있으니 아무리 행복해도 때로는 밑둥 잘리우고 잎만 무성한 나무 같습니다. 아무리 어렵게 살았어도 내 선조의 뼈가 묻혀있고 그동안의 정을 고스란히 그곳에 묻어두고 온 우리로서는 고향이 그리울 때가 참 많습니다. 명절이 되면 없는 살림에도 옹기종기 맛보라고 담아들고 다니던 이웃들, 이곳에서 명절이 되면 그 모습들이 목 메이게 그리워진답니다.
사랑하는 나의 오빠, 언니. 그동안의 좋은 일들, 얼룩졌던 일들 어찌 이 작은 종이위에 다 적을 수 있겠습니까? 그나마 이 동생이라도 좋은 세상에서 살고 있다는 기쁨을 느껴보시라고 이렇게 편지를 썼습니다. 비록 가진 것은 없지만 오염 한 점 없는 맑고 깨끗한 자연 속에서 살고 계시는 우리 사랑하는 오빠 언니께서 이 동생보다 더 건강하게 오래오래 장수하시라 봅니다. 꼭 다시 만날 때까지 오래오래 사세요. 머리 숙여 이 동생이 큰 절을 올립니다.
다시 만나는 날까지 안녕히 계십시오.
서울에서 동생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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