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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쩌민(강택민)의 10대 죄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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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구도중생 작성일17-08-07 18:33 조회30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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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쩌민(강택민)의 10대 죄악(출처:대기원시보)

죄악1: 매국노 출신으로 공산당에 투신

죄악2: 간첩활동으로 매국행위를 하다

죄악3: ‘6.4 천안문 학살’ 통해 정권 장악

죄악4: 싼샤댐 건설로 대재앙 초래

죄악5: 군대를 사병화하고 흉악한 통치

죄악6: 법제를 파괴함이 절정에 이르다

죄악7: 부패통치와 가족의 거대한 부정축재

죄악8: 색정통치로 도덕상실에 앞장서다

죄악9: 파룬궁을 박해하며 전 세계를 기만

죄악10: 생체장기적출 지시해 인성을 멸절

[편집자 주] 중국 고대의 형법제도 중에는 ’10악(十惡)’ 이라는 것이 있었다. 이 죄는 사회에 중대한 해를 끼치는 범죄이기 때문에, 수당(隋唐)시기부터 역대의 법전에서 모두 ’10악’을 거론했고 중죄로 다스렸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는 거론되지 않았고 대신 더욱 많은 형법 조항으로 분류해 단속해왔다. 하지만 중공사회에서의 특권계층은 형법의 제약을 받지 않았고, 그 죄를 추궁하지 않았다.

장쩌민은 전 중공총서기로서, 법 위에 군림했으며 그가 저지른 큰 죄는 과거의 법으로도 적용시킬 수 없고 판정을 내릴 방법이 없다. 장쩌민은 사람을 놀라게 할 수십 가지의 중죄를 범했지만, 지금까지 여전히 법적 제재를 받지 않고 법 밖에서 자유자재로 활개치고 있다. 여기서는 장쩌민의 ’10대 죄악‘과 관련된 주요 범죄 역사를 살펴보려고 한다.

죄악1: 매국노 출신으로 공산당에 투신

장쩌민은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지역 명문이었던 양주중학교 입학시험에 합격하지 못하고 장더우(江都) 현립 초급중학교에 합격되어 의기소침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듬해 부친의 권세로 양주중학교에 들어갔다. 후에 또 부친을 등에 업고 괴뢰 난징중앙대학에 입학했다. 그때부터 장쩌민은 출세를 하려면 권력과 돈이 없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됐다.

1945년 일본군이 전쟁에서 패하고 투항하자 국민당정부는 일본군에 함락 당했던 지역의 공립 전문대학 이상의 재학생들에 대해 적격심사를 했다. 난징중앙대학과 상하이교통대학 등 6개 대학교가 괴뢰 학교로 판정받았고, 그 학교의 학생들은 괴뢰 학생으로 불리어 전부 적격심사를 받았다. 이때 장쩌민은 자신이 심사 대상이 되자 너무 무서워 학교를 떠나 도망가기도 했다.

친일 행위를 한 장쩌민의 부친 장관첸도 큰 재난이 앞에 닥쳤다고 느끼고 장관첸이라는 본래 이름을 장스쥔으로 바꿔 고향에 도망가 한동안 숨어 살았다. 장쩌민 역시 한동안 숨어지내다가 상황이 완화되자 다시 모습을 드러냈으며 후에 이 시기 경력을 감추기 위해 1943년에 중공지하당조직의 학생운동에 참가했다고 거짓말을 한다.
 
죄악2: 간첩활동으로 매국행위를 하다

1955년은 중국과 소련이 서로 갈등하기 시작한 해로서, 쌍방은 겉으로는 평화로워 보였지만 겉과 속은 완전히 달랐다. 쌍방은 상대국을 교란하기위해 간첩을 양성하기 시작했다. 장쩌민은 이때 소련으로 들어가 모스크바 자동차제조공장에서 일했는데 소련 정보 당국은 커라와(克拉娃)라는 젊은 여자 스파이를 파견해 장쩌민에게 접근시켰다. 여자를 좋아하던 장쩌민은 단번에 커라와의 품에 빠졌고 소련 정보 당국의 손아귀에 놀아나게 됐다.

소련 당국은 장쩌민이 신분 세탁을 한 비밀을 지켜주기로 하고 장쩌민에게 소련에 유학 온 중국 유학생과 중국의 여러가지 정보를 책임지고 수집하는 임무를 맡겼다. 장쩌민은 모스크바에서 중국으로 귀국한 후에도 계속적으로 간첩 활동을 했다.

소련은 장쩌민의 간첩 경력을 철저하게 이용하는데 나중에 소련과 중국이 비밀리에 체결한 ‘중러국경선의정서’에 완전히 드러나게 된다.

장쩌민은 1991년과 1994년에 러시아를 방문한 후, 당시 러시아 대통령 옐친과 ‘중러국경선동단협정’과 ‘중러국경선서단협정’을 체결했다. 1999년 옐친이 베이징을 방문했을 때 두 사람은 또 ‘중러국경선동서양단에 관한 서술의정서(关于中俄国界线东西两段的叙述议定书)’를 체결했다.

이 의정서는 이후 중러국경선을 결정짓는 국가 간 중요한 문서로 됐다. 이 조약은 중러사이의 국경선 98%를 확정지었는데 2001년 7월 장쩌민은 재차 모스크바를 방문해 ‘중러선린우호합작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 제6조에는 98%의 국경선을 재차 인정하는 내용이 포함됐다. 결국 장쩌민은 이 조약으로 중국 땅 약 344만 평방 킬로미터를 러시아에 헌납하게 된다.
 
죄악3: ‘6.4 천안문 학살’ 통해 정권 장악

1989년은 장쩌민의 정치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한 해였다. 장쩌민은 ‘6.4’사건을 진압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 사건은 당시 상하이시위 서기로 퇴직을 준비하던 장쩌민으로 하여금 단번에 당, 정, 군 최고 권력을 장악한 최고위급이 되게 하였고, ‘6.4’ 학살사건의 최대 수혜자가 됐다.

1989년 4월 8일, 공산당 내의 양심파로 불리던 후야오방(胡耀邦)은 정치국회의 도중 갑자기 심장병이 발작해 사망했다. 이 사건은 중공정치에 대한 민중들의 불만을 촉발시켰고, 민중들은 중공개혁의 미래에 심한 비애와 실망으로 가득차게 됐다. 분노는 사회 곳곳에서 공개적으로 표출되기 시작했다.

베이징의 수 천명 학생들은 학교를 벗어나 톈안먼 광장으로 모이기 시작했고 후야오방을 추모하는 화환을 인민영웅기념비 앞에 놓았다. 학생들은 “후야오방을 추모한다” “부패를 제거하자” “법에 따라 나라를 다르리자” “관료주의를 타도하자” 등 표어를 내 걸었다. 동시에 전국각지의 학생들도 잇달아 호응하여 대규모 집회, 퍼레이드, 청원 활동을 벌였다.

상하이 시위서기 장쩌민은 이를 진압하고자 언론을 탄압하고 언론인들을 구금했는데 이것이 오히려 화근이 되어 사태는 더 확대됐다. 5월 하순 중공 판공청은 장쩌민에게 사태 책임에 대한 해명을 하라면서 베이징 대책회의에 참석하라고 통보했다.

5월26일 밤 장쩌민은 안경까지 바꾸고 교수로 분장하였으며 경호원 4명을 데리고 아주 긴장하면서 마치 사형장에 가는 것처럼 베이징으로 들어갔다. 당시 베이징 거리는 완전히 학생들에게 장악되어 있었다.

당시 총서기는 자오쯔양이었는데, 장쩌민은 자오쯔양 몰래 비밀편지를 리펑과 덩샤오핑한테 썼다. 당내의 몇몇 원로들에게 무력으로 시위를 진압하고 이른바 ‘20년의 안정’을 바꾸어오자는 내용이었다. 결국 장쩌민은 사태를 진정시키려면 민중들을 대학살하는 방법밖에 없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 편지는 대학살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아주 관건적인 작용을 일으켰다. 결국 장쩌민은 자오쯔양을 몰아내고, 자신이 대학살 후의 가장 큰 수혜자가 됐다.
 
죄악4: 싼샤댐 건설로 대재앙 초래

중국에서 물 문제 하면 싼샤댐을 빼놓을 수 없다. 장쩌민이 중공총서기 자리에 오른 후 처음으로 베이징을 떠나 시찰한 곳이 바로 싼샤댐이다. 1989년 이후 싼샤공정에 관한 중대한 결정은 모두 장쩌민이 주관하고 결정한 것이다. 당시 장쩌민의 추진 하에 사업계획안이 중공인대에서 통과됐다. 1994년 장쩌민이 결정을 내리고 착공을 시작했다.

2001년부터 2002년까지, 장쩌민 집권시기 싼샤공정은 엄중한 부정부패 현상이 나타났고, 공사 과정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아직 완공되지도 않은 싼샤댐에 40개 이상의 균열이 나타났다.

싼샤공정에 들인 자금은 220억 달러이고, 거주지를 옮긴 주민만 약 130만 명이다. 이렇게 큰 항목임에도, 준공식 때 중공고위층은 한 사람도 참가하지 않았다. 이것은 장쩌민이 저지른 재앙에 누구도 같이 책임을 지지 않으려고 한 것이다.

나중에 싼샤댐 공사 관리들은 조사를 받기 시작했는데 매년 공고하는 공정 규모는 최소 100억 위안 이상이었지만 2014년 이전까지 정상적인 입찰공고를 한 번도 거치지 않았다. 거액의 자금은 부동산투자를 하는데 횡령되었고, 또 중공 고위층에 상납했는데 그 중 많은 자금은 장쩌민 집단에 흘러 들어갔다.
 
죄악5: 군대를 사병화하고 흉악한 통치

장쩌민은 ‘6.4’ 학살을 통해 중공 당, 정, 군의 최고 권력에 올라간 후 권력을 견고하게 하기 위해 갖은 애를 다 썼다. 결국 ‘6.4’때 군대를 움직여 민중을 탄압한 사례를 통해 ‘안정이 일체를 압도한다’는 명분하에 무장경찰부대를 건립하고 확충하여 자신의 통치를 유지하는 개인군대로 삼았다.

중공의 체제에 근거하면, 무장경찰은 동시에 중공중앙군사위원회, 국무원, 중공중앙정법위윈회 3개 계통의 지휘를 받게 된다. 장쩌민은 점차적으로 이 세 개 중요 기관에 모두 자기 사람을 심어놓았다.

이 ‘무장경찰’은 조직폭력배 성질을 띤 장쩌민 개인군으로 전락하였는데 학생, 상방민, 신앙단체, 땅을 잃은 농민, 실업공인 등을 대처하는데 사용됐다. 또 인질납치, 살인 등 무자비하고 사악한 방면의 훈련을 거쳤으며 군대화된 무력장비를 구비했다. 이것은 정상사회의 경찰 운영 방식과 완전히 달랐다.

신장 위구르족, 티베트인을 탄압할 때, 여러 차례 실전연습을 했다. 그 살인폭력수단은 사람들을 보기만 해도 몸서리가 쳐질 정도로 잔혹했지만 장쩌민은 도리어 아주 만족했다. 파룬궁수련자, 퍼레이드시위, 집회사건, 상방민 등을 탄압할 때, 무장경찰과 공안 그리고 대량의 사복경찰 3자가 연합하여 무수한 폭력과 억울한 사건을 만들어 냈다. 그러면서 장쩌민은 전국치안회의에서 “몇 백만 무장경찰과 공안경찰이 우리손안에 있는데, 우리가 무얼 두려워하는가?”고 말했다.

장쩌민은 무장경찰 등 개인군대를 중공체제 내에서 가장 큰 암흑 조직으로 만들었으며, 이때부터 중국에서는 암흑가 조직이 권력과 결탁하여 세력을 넓혔으며 조직을 유지하기위해 중공고위층에 금전과 미녀를 제공했고, 중공 고위층은 이를 마다하지 않았고 당연히 받았다. 어떤 암흑가 두목은 인민대표대회, 정협, 나아가 사법기관까지 진출하기도 했다.
 
죄악6: 법제를 파괴함이 절정에 이르다

장쩌민이 최고 지위에 오른 후 표면적으로는 집단지도체제였지만 실제로는 독재체제였다. 중국공산당 정법위원회는 헌법과 법률을 관할하는 상설기구이다. 직능 범위에서 말하면, 정법위원회(정법위)는 인민대표대회, 공안검찰법원과 일치되면서도 교차된다. 법제계통으로 볼 때 정법위는 법률 위에 군림하고 있으며, 법제를 파괴하고, 안건을 조작하고 특권을 수호하고 있다. 나라의 법제에 대한 장쩌민의 이런 태도는 중국 인민의 감정을 지극히 자극했다.

1987년, 자오쯔양은 중공13차대표대회 보고에서, 정치체제개혁의 관건은 당정분리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 개혁은 잠깐 나타났다가 바로 사라져버렸다. 1990년 3월 6일, 후임자 장쩌민은 정법위원회 편제를 개편하면서 권력을 끊임없이 팽창시켰고, 편제도 계속 확대시켰다. 1991년 3월 21일, ‘중앙사회치안종합처리위원회’를 신설하였고. 1999년 7월, 파룬궁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중앙610사무실’을 설립했다.

장쩌민은 파룬궁을 박해하였기에 정계에서 물러난 후에도 책임을 피하기 위해 파룬궁 탄압의 주모자인 저우융캉을 17대 정치국상무위원에 들여보냈다. 그리하여 장쩌민을 배경으로 하는 정법위는 실권이 막강해 후진타오와 원자바오보다 권력이 강한 ‘제2권력중앙’이 됐다.

저우융캉이 중공공안부 장관과 정법위서기를 담당했던 기간, 중국대륙의 형사 사건은 해마다 17%내지 22%의 폭으로 상승했다. 민중들은 공안 부문이 중국 권력에서 가장 부패하고, 어두운 조직이라고 인정하고 있다. 중국의 형사 사건율은 점점 많아졌고 암흑가세력이 제멋대로 날뛰고, 사회치안에 대한 각지 민중들의 불만은 갈수록 높아졌다.

정법위는 고의적으로 정부의 반대세력 및 전복세력을 만들었고, 긴장 분위기를 조성했다. 그리고 저우융캉은 ‘안정유지’란 깃발을 내걸고, 제멋대로 사람을 증가하고 공안을 움직였다. 폭력으로 민중을 잔인하게 압박할수록, 폭력 항의 사건은 갈수록 많아졌고, 국가는 갈수록 난잡해졌으며, 정법위가 나설 수 있는 명분은 많아졌다. 국민들이 정상적으로 사법절차를 통해 요구를 제기할 수 있는 길은 전부 막혀있었다. 정법위 체계는 법률과 구호를 내걸고 폭력 세력을 위해 길을 열어주는 가장 큰 암흑세력으로 되었고, 장쩌민은 가장 큰 암흑가의 두목으로 됐다.
 
죄악7: 부패 통치와 가족의 거대한 축재

1989년 6.4 톈안먼 학살은 중공에 거대한 공포와 압력을 가져다주었다. 안팎으로 궁지에 몰린 중공은 통치의 합법성과 생존에 있어 전례없던 도전에 직면하게 됐다. 장쩌민은 전면적인 부패통치로 당 간부들의 충성심을 유도했다. 장쩌민은 무능했지만 권모술수에는 매우 능통했다. 장쩌민은 비밀리에 돈을 모으기 시작했다. 이에 당 간부들도 부패자금을 모으기 시작했다. 이러한 ‘부패치국’은 전 국민을 따라서 타락하게 했다. 장쩌민 통치기간 지방에서 군대에까지, 무장경찰에서부터 공안에 이르기까지, 부패를 통한 통치를 전면적으로 실시했다.

장쩌민 통치하의 군대는, 부패수단을 통해 군대를 통제하고, 군권을 공고히 하였다. 부패가 더욱 심해지자 이익을 위해 자주 격렬한 싸움이 벌어졌다. 군대를 통한 밀수는 장쩌민의 종용과 보호 하에 점점 더 수습할 수가 없게 됐다. 중공 내부소식에 의하면, 1999년 2월 2일부터 2월 22일까지, 각 군, 각 성의 군대 내부에서는 대규모 밀수가 횡행했고. 이익을 차지하기위해 크고 작은 몇 백 번의 격렬한 총격전이 벌어졌다.

주룽지(朱鎔基) 전총리가 당시 회의에서 밝힌데 의하면, 98년 상반기에만 군대가 총이나 포를 쏘거나 혹은 때려죽인 밀수 진압 요원, 공안, 무장경찰, 사법간부는 총 450명이었고, 맞아서 상처를 입은 자는 2200여명이다.

회의에서는 또 “군대 조사 과정에서 증인을 살해하고 거금을 가지고 도망가는 등 악성사건 130종이 드러났다. 그 중 후베이성 군구 참모장, 랴오닝성 군구 후근부 사무실 주임, 지난(濟南) 경비구 후근부 대리 부장 등은 이미 거금을 가지고 해외에 도망갔다”는 사실도 폭로됐다.

장쩌민은 13년간 집정했다. 정권을 내놓은 후에도 또 2년간 군권을 틀어쥐었다. 군권을 내놓은 후에는 또 패거리들을 조종하여 중국의 정국을 지금까지 교란하였다. 20여 년이래, 중공의 관료사회는 이미 탐관오리들이 이익다툼을 하는 검은 소굴로 됐다.

1992년 장쩌민이 당,정,군을 장악한 후, 그 아들 장몐헝(江綿恆)은 ‘중국제1 탐관오리’란 칭호를 얻었다. 근년 이래 세계를 뒤흔든 중국의 여러 부패사건, 예를 들면 ‘저우정이안(周正毅案)’ ‘류진바오안 (劉金寶案)’ 사건 등은 모두 천문학 숫자의 부패자금과 공금횡령에 연루되었는데, 모두 장몐헝과 연관이 있다. 일부에서는, 장쩌민 가족의 탐오부패와 관련된 금액의 수는 거대하기로 극에 달했으며 그 중 많은 것은 모두 장씨 가족이 관리하는 기업에 숨겨져 있다고 여긴다.
 
죄악8: 색정통치로 도덕상실에 앞장서다

장쩌민이 부패로 나라를 다스리는데 있어서 호색과 음란을 빼놓을 수 없다. 색정방면에서 자신이 앞장서서 작용을 일으켰다. 장쩌민은 정부(情婦)가 아주 많았는데, 그 중에는 쑹주잉(宋祖英), 리루이잉(李瑞英), 천즈리(陳至立), 황리만(黃麗滿), 소련 여간첩 커라와 등 수많은 여자가 있다. 그 중 가장 관심을 받는 사람은 쑹주잉이다. 1991년 쑹주잉이 ‘춘절야회’에서 노래를 부를 때 할아버지 벌 되는 색마 장쩌민의 눈에 들게 됐다. 장쩌민은 후에 쑹주잉을 해군정치부가무단(海政歌舞团)에 전입시켜, 쑹주잉으로 하여금 위세가 대단하게 했다. 장쩌민은 해군정치부가무단에 가서 공연을 본 후, 쑹주잉과 악수할 때 몰래 ‘일이 있으면 큰 오빠를 찾아라’는 쪽지를 주기도 했는데 쑹주잉은 후에 득의만면하여 이 쪽지를 주위 사람에게 보여주며 자랑하기도 했다.

‘앞장서서 대중을 이끄는’ 장쩌민 때문에, 중공 관리들한테서 비도덕적인 일들이 꼬리를 물고 나타났다. 장쩌민의 파렴치한 시범작용은, 수많은 색마 관리들을 배양해냈다.

장쩌민이 재위한 10여 년간 중공 각급 관리들은 전부 음란 붐에 휘말려 들어갔다. 중공 관리들은 첩을 두는 것과 애인을 만드는 것을 필수적인 신분 장식으로 삼았고, 또 황색산업을 크게 발전시켰다. 누가 첩을 두지 않고 애인이 없다면 격이 떨어진다고 여겼고, 애인을 두는 것을 영광으로 여기고, 애인을 두지 않는 것을 치욕으로 삼는 관료사회문화를 형성했다.

장쑤우시(江蘇無錫)시의 시 정부 관리는 현지에서 젊고 아름다우며 고학력을 가진 여자들을 한 무리 선발하여 ‘공관(攻關)’ 교육을 시켰다. 그런 후 전부 베이징에 보냈으며, 중앙 부급(部级) 이상 고위관리의 색정공물로 바쳤다. 관리들이 서로 허세를 부리며 비교하는 내용은 금전과 권세 및 지위로부터 첩이 몇 명이나 되는가로 확장됐다. 심지어 유부녀를 납치하는 사건도 끊임없이 일어났다.

고위관리들 중에서 장쩌민이 대장(大将)이었고 중공 전 정법위서기인 저우융캉이 두 번째였다. 이들은 여성을 가지고 노는데 습관이 되어있어 ‘백계왕(百鸡王)’ 이란 별명도 붙었다. 저우융캉은 쓰촨성위서기를 맡은 기간, 여러 차례 부녀를 강간했는데, 이 중에는 호텔 종업원도 있었다. 저우융캉은 보시라이를 통해 정기적으로 여인을 제공받았다. 그 중 28명은 이미 신분이 확인되었는바, 그 속에는 가수, 여배우, 여대생, 아나운서가 포함된다. 저우융캉은 베이징에만 6곳의 ‘아방궁’이 있었고 이곳에서 음탕하게 즐기고 놀았다. 저우융캉은 또 보시라이와 함께 가수 애인을 공유하기도 했다. 저우융캉 사건이 폭발한 이래, 중앙TV방송국은 ‘중공고위관리의 후궁’이란 조롱을 받았다.
 
죄악9: 파룬궁을 박해하며 전 세계를 기만

1992년 5월, 리훙쯔 선생은 중국에서 파룬궁(파룬따파)을 널리 전하기 시작했다. 불과 7년만에 1억 명이 수련함으로써 바른 수련법으로 증명되었으며, 진·선·인의 표준에 따라 수련하면 신체를 건강하게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사회를 안정시키고, 사람들의 도덕성을 제고하는데 있어서 비할 수 없는 큰 작용을 일으켰다.

1999년, 톈진 파룬궁수련자는 당국의 불법탄압을 받자 4월25일 단체로 국무원신방사무실에 청원을 갔다. 중공총리 주룽지가 파룬궁대표를 접견하고 대화를 나누었으며 합의가 이뤄져 일이 원만히 해결됐다. 그러나 장쩌민은 그날 밤 중공정치국상무위원회 및 유관인사한테 편지를 썼고, 파룬궁에 대해 ‘정치원칙과 노선의 입장’에서 비판하기 시작했으며, 또한 상무위원회에서 크게 화를 냈다. 파룬궁의 출현과 신속한 전파를 “국내외 적대세력이 우리 당과 군중을 쟁탈하고, 진지를 쟁탈하는 정치투쟁이다”고 말했다.

이후 2~ 3개월간, 장쩌민은 파룬궁 문제에 대해 크고 작은 지시를 13차례나 내렸고, 여러 차례 회의를 주도했으며, 직접 파룬궁을 타격하는 정치박해운동을 발동했다. 그는 3개월 내에 파룬궁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고 공공연하게 말했다.
7월 19일, 장쩌민은 탄압을 시작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수만 명의 무장경찰은 완전무장한 후 전투태세를 갖추고 베이징에 진입했고, 주변 군대는 일급비상상태에 들어갔다. 7월 20일, 장쩌민은 명령을 내려 전국에서 대 체포를 시작했다.

장쩌민을 몹시 화나게 만든 것은, 산둥, 랴오닝 등 소수 성을 제외한 많은 성과 시 정부가 파룬궁을 탄압하는데 동조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특히 광둥 등 남방일대는 더 심했다. 2000년 2월 장쩌민은 직접 광둥에 가서 감독하고 지휘했다. 2001년 신년 섣달그믐날, 장쩌민은 톈안먼광장에서 ‘거짓 분신자살 사건’을 만들어 파룬궁을 모함했다. 이것으로 국민과 전 세계를 기만하려고 시도하였으며, 파룬궁에 대한 증오를 불러일으키려했다.

장쩌민은 또 전문적으로 탄압에 종사하는 불법기구인 ‘610’사무실에 밀령을 내렸다. 파룬궁에 대해 “명예를 실추시키고, 경제를 무너뜨리며, 육체를 소멸하라”는 정책이었다. 수련을 포기하지 않은 파룬궁수련자에 대해서는, “때려죽이면 자살로 위장하라” “때려죽여도 추궁하지 않겠다” “신원을 조사하지 말고 직접 화장하라”고 지시했다.

‘밍후이왕’ 보도에 의하면, 2015년 7월까지 박해 받아 사망한 자는 총 3864명이고, 생체장기적출을 당해 사망한 자는 수만 명으로 추정된다. 불법판결, 노교소, 세뇌반과 정신병원 혹은 지하 감옥에 감금된 파룬궁 수련자는 수백만 명이 된다. 불법감금 속에서 또 수백 종의 고문을 당했는데 장쩌민을 핵심으로 하는 이 잔혹한 탄압은 중공의 거의 모든 당정기관들이 참여하게 된다.
 
죄악10: 생체장기적출을 지시해 인성을 멸절

장쩌민과 중공은 서로 이용하면서 불법적으로 파룬궁을 박해하였다. 장쩌민은 학살정책을 내려 보냈고, 더욱 경악할만한 사건은 장쩌민이 중공 당, 정, 군을 움직여, 파룬궁수련자의 생체장기를 적출하라는 비밀지령을 내려 보냈다는 것이다. 수많은 파룬궁수련자들이 생체장기적출을 당하면서 학살당했다.

2006년에 중공이 파룬궁수련자의 생체에서 장기적출을 감행한다는 사실이 처음으로 폭로된 이래 중공 당국은 줄곧 부인했다. 도리어 파룬궁이 ‘요언을 날조한다’고 모함했다. 국제사회에서도 ‘생체장기적출’ 이란 이 화제가 너무나 끔직한 내용이었기에 충분한 관심을 주지 않았다.

《대기원》에서 단독 보도한 녹음에 의하면, 2006년 9월13일 당시 상무부장관으로 있던 보시라이는 중공총리 원자바오를 따라 독일 함부르크를 방문했을 때, 직접 자기 입으로 “장쩌민이 파룬궁수련자의 장기를 산채로 적출하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승인했다.

2014년 9월 30일, 중공군 총후근부 위생부 장관 바이수중(白書忠)을 조사한 전화녹음이 ‘파룬궁박해추적조사’에 의해 폭로됐다. 녹음내용에서 중공국가주석 장쩌민이 파룬궁수련자의 장기를 생체적출하라는 명령을 내렸다는 사실이 증명됐다.
캐나다 전 아태담당 국무장관 데이비드 킬고어는 이 부문에 조사를 진행한바 있다. 2005년까지 5년간, 중국에서 장기를 이식한 숫자는 4만 1500사례인데, 이 숫자는 중국에서 정상적으로 공급되는 장기 숫자가 아니기 때문에 장기가 파룬궁수련자의 생체장기적출에서 왔다고 해야만 해석될 수 있다.

‘파룬궁박해추적조사’는 2004년 7월1일까지 251편의 체계적인 조사보고서를 발표했고, 5,300여개 증거를 들었으며, 5,000여개 추적조사통고와 7차례 추적조사명단을 발표하였다. 범죄 혐의가 있는 사람의 숫자는 다음과 같다. 610 계통 3532명, 정법위계통 4147명, 파룬궁수련자에 대한 생체장기적출에 참가한 혐의가 있는 기관은 865개, 의무요원은 9,500명이다. 기타 파룬궁수련자에 대한 박해에 참여해 증거를 추적조사 당한 책임 기관은 1만 2670개이고 책임자는 3만 2394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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